만화가 이원복

서재는 전시 공간이 아닌 임시 보관고(保管庫)
나에게 서재는 냉장고와 같아요. 신선한 식품을 오랜 기간이 아니라, 일정기간 보관해두는 곳이 냉장고잖아요. (사람 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책을 소장 가치가 있는 보물로 여기는 분들은 좋은 서가에 모든 책을 진열해 놓고 영구적으로 보관을 하겠죠. 그러나 저 같은 경우에는 책을 주로 자료로 활용하기 때문에 영구적으로 보관하는 책은 게을러서 버리지 않는 책 밖에 없어요. 내 서재는 책을 자료로 이용할 가치가 있는 동안만 보관해두는 곳이니까, 신선 식품을 보관하는 냉장고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죠.
자료로써의 책 읽기와 취향으로서의 책 읽기
저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독서가 있어요. 하나는 자료로써의 독서인데, 책을 끊임없이 뒤지고, 읽고, 버리고, 또 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직업상의 이유로 시도 때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얼마 전에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 편>을 집필할 때는 중국에 대한 책을 무한대로 사다가 보기도 했습니다. 내가 다루는 대상에 대한 정보가 있는 책이면, 자료로써 부지런히 수집하고 버리고 그러는 것이죠. 두 번째는 내가 좋아서 읽는, 취향으로서의 독서인데, 주로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서 책을 봅니다. 취미로 읽는 책의 종류는 굉장히 다양한데, 아무래도 하고 있는 작업의 연장선이 되는 책을 많이 읽게 돼요. (최근에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책이라든지 세계역사관련 책들을 많이 읽고 있습니다. 책을 읽을 때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해서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는 책은 소설책 밖에 없고, 나머지 책은 필요한 부분만 대충 훑어보는 정도예요. 첫 장부터 끝장까지 다 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감당이 안 되거든요. 많은 자료를 커버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느 책을 사더라도 정말 관심이 가는 책을 제외하고는 거의 일정부분만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화는 나에게 놀이터이다
만화는 정의를 하자면 놀이터예요. 내가 하고 싶은 놀이, 가고 싶은 곳, 또 하고 싶은 짓 모두를 도화지 위에서 무한히 펼칠 수 있기 때문에 만화는 영원히 내가 살아있는 한 즐기면서 놀 수 있는 놀이터 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만화를 그렸는데 만화가의 길을 걷도록 선택 하는데 도움을 준 책은 없지만 ‘만화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에 도움을 준 책은 있어요. 하나는 프랑스의 만화인 <아스테릭스>라는 책이에요. <아스테릭스>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미국의 ‘미키마우스’와 같은 존재인데, 프랑스 사람들은 미국의 ‘미키마우스’에 비해서 <아스테릭스>에는 문화가 담겨 있다고 자랑을 하곤 하죠. 또 하나는 역시 프랑스 책인데 알렉상드로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 이라는 책입니다. 그 당시 통속소설인데, 제가 이 책을 주목하는 이유는 내용보다도 소설적 스토리텔링 구조예요.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장대한 신문연재 소설인데 주인공설정, 스토리전개, 복선, 그리고 뜻밖의 반전 등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가지고 있는 소설이에요. 제가 볼 때 이 책만큼 하나의 창작스토리에서 스토리텔링 과정이 완벽한 책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어떤 만화를 그릴 때, 이 책에서 소위 말하는 스트럭처:작품의 구조에 대해 굉장히 많이 배웠습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이야기 보따리
제가 잘한 것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10년간 외국에 나가있으면서도 (먼나라 이웃나라)의 연재를 중단하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거의 50년 가까운 기간동안 독자하고의 연대를 끊지 않았던 것이, 엄마가 읽고 아이까지 읽는 대물림이 될 수 있었던 이유인 것 같아요. 그런 오래된 독자 팬들과의 연줄을 유지한 것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내가 돈을 벌겠다, 이 책을 쓰지 않으면 큰일난다는 의무감에서 한다면 오래할 수가 없어요. 얼른 끝내고 쉬고 싶겠죠. 그런데 항상 다음에는 무슨 책을 쓸까, 무엇을 할까를 연구하는 즐거움과 나 스스로에 대한 기대감이 있고, 또 아직도 내 속에는 못다한 이야기들이 많아요. 이런 이야기도 하고 싶고 저런 이야기도 하고 싶고… 그런데 이제는 체력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아마도 체력이 허락하는 한해서 계속 이야기를 펼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만들고 있는 작품은 <먼나라 이웃나라>의 마지막 편이 되거나, 마지막에서 두 번째가 될 수도 있는데, 대단원의 의미로서 <먼나라 이웃나라 스페인 편>을 작업하고 있습니다.

( ‘내 인생의 책’ 으로는, 제가 최근에 아주 관심 있게 읽은 책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내 인생의 책
-
- 후쿠자와유키치의 아시아침략사상을 묻는다
- 야스카와주노스케 | | 역사비평사
- ‘야스카와 주노스케’라는 일본사람이 지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사상을 묻는다> 라는 책입니다. 일본 돈의 제일 고액권인 1만 엔짜리 지폐에 나오는 초상화가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 입니다. 이 사람은 일본의 게이오 대학을 만든 창립자이자, 일본의 근대화의 방향을 제시했던 일본의 위대한 사상가였습니다. 이 사람의 동상과 흉상이 일본 전역에 퍼져있을 만큼 일본인들에게는 현대 일본을 만든 굉장히 중요한 정신적 지도자이며 스승입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이라는 것은 일본은 아시아를 벗어나서 유럽으로 들어가야지만 부강할 수 있다는 탈아론(脫亞論)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사상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강자가 주장하면은 그것이 곧 법이라는 힘의 논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탈아론이 나오기 전까지 일본국민은 중국문명에 대한 존경심과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처음으로 떼놈, 돼지꼬리, 야만인이라고 중국을 폄하하고 야만화시켰습니다. 또한 조선에 대해서도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로 폄하하면서, 정한론과 한일 합방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침략근성과 힘의 논리가 일본인들을 그만큼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세계 2차대전의 원흉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1만 엔짜리 제일 고액권에다가 이 사람의 초상화를 넣어서 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본이 아직도 이 사람을 존경하고 있다는 의미니까, 일본이 진정으로 과거에 대한 회개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개화기 때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약육강식의 원리에 의해서 움직였는가 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