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산 굿
일월산 굿
글/사진: 정종훈(달새)
사바세계 남선부주 해동동국
대한민국 영양군 00면 00리
2007년 3월 23일
만부정을 풀어 낼제
세인할마니 칠성님 제석님.
해를 묵고 철을 문 부정
눈으로 본 부정 귀로 들은 부정 입으로 지어낸 부정
상문부정 남녀상문부정 돌부정 뉘부정 골라내고
더이상은 무슨 말인지 도통 이럴땐 녹음기라도 있어야 하는건데...
굿의 순서는 각 고장 마다 다 틀리겠지만 영양에서 열리는 굿은
1.앉은 부정.
2 선부정.
3 산신축원.
4 선거리 (천왕,산신,대감).
5 칠성거리.
6 신장장군(서낭신 굿풀이. 오방천 풀기).
7 조상.
8 거리상(무주고혼제).
9 뱃놀이 순서로 이어진다
여기서 앉은 부정이란 신들을 모시기 위해 달비를 머리에 얹은 채로 앉아 요령을 들고 하는 앉은 채로 하는 굿을 앉은 부정이라 하고 동해안 별신굿에서 보 듯 바가지에 물을 담아 칼로 선채로 하는 부정(不淨)을 선부정이라 한다
부정굿은 제사 지내는 곳을 깨끗이 한다는 의미의 굿이다
용화골에 갑자기 장고와 북 징소리가 울려 찾아간 곳이다
새벽부터 시작한 굿이라는데 그럼 절반은 놓진 셈이다
그러나 어떤가?
가끔 작은 굿판은 보았지만 이리 큰 판은 처음이다
위 장면들은 선거리중 산신의 장면이다
이 굿은 어느 문중의 자손번창을 기원 하는 굿 이였다
그래서 신청인의 얼굴이나 전체를 다 보여 주지 못함을 이해 하시길 바란다
말뜻 전체를 자세히 다 알아 들을 수 는 없지만 자세히 들어 보면 끊임 없이 쏟아내는 말속엔 재치와 유머 그리고 애환등이 섞여 있어 보는 이들들을 자꾸 굿판으로 빠져들게 한다
선거리의 대감부분
박수가 하는 춤인데도 발의 춤사위가 예쁘다
갑자기 템포가 무지 빠른 흥겨운 사물 소리와 함께 "신 받아 보세" "신 놀아 보세" 란 노래로 모든 칠성신을 불러 모으는 소리가 내 발과 어깨를 저절로 들썩이게 만든다 박수무당의 선창과 음을 사물과 연주하는 이들의 합창이 절묘하다 굿에서 합창이란 말이 어색 하지만 달리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 소리들을 뭐라 표현 할 수 없다
칠성을 모시고 장수와 부귀를 기원하는 굿. 칠성은 북두칠성을 일월화수목금토(日月火水木金土)의 정수라고 보는 신앙으로, 불교·도교·민간신앙이 복합되어 있다. 민간에서는 견우와 직녀가 칠석날 만난다는 속설 때문에 7월 7일 칠성고사로 치성을 올린다. 칠성은 비린 것을 싫어하므로 제물로는 고기반찬이 없는 소식(素食)을 준비하는데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백설기를 들 수 있다. 칠성굿에서는 동서남북의 칠성과 견우·직녀성, 남극노인성을 부르게 된다. 지역에 따라 제의형식에 약간 차이가 있기는 하나 대개 불교와 유교적 색채가 두드러져 있다. 제주지역에서는 북두칠성으로부터 수복(壽福)을 받고 태어난 사람을 '칠성 태운 사람'이라 하여 1년에 1번, 또는 몇 년에 1번씩 집이나 들판의 정갈한 곳에서 밤에 큰 굿으로 위한다. 서울지역에서는 색동으로 된 쾌자 위에 백장삼을 입고 머리에 백고깔을 쓰고 홍가사를 걸치며 목에 백팔염주를 걸고 양손에 제금을 갈라 잡고 굿을 한다. 부여지방에서는 원삼을 입고 고깔을 쓰고 안방이나 대청에 차린 굿상 앞에서 장구를 놓고 앉아서 안진반장단의 무가를 부른다. 부안지방에서는 무당이 맨머리에 흰 치마저고리로 평복차림을 하고 외장구장단에 육자배기토리의 무가를 부른다.<백과사전 인용>
장구장단에 육자배기로 1시간 넘게 이어지는 이 굿은 정말 볼만 하다 지나가는 이 모두 어깨를 들썩이며 장단을 칠 정도로 흥쾌하며 반복되는 가사임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의 마음을 흥겁게 굿판으로 이끈다
박수무당의 칠성굿이 행해지자 소북을 치던 남수남 무녀가 접신이 되었는지 치던 북을 다른이에게 넘기고 같이 장단을 맞추며 나간다.
굿이란 무당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신에게 기원할 목적으로 제물을 바치고 가무등을 의식를 통해 하는 제의 행위이다 원래 고대부족국가 시대부터 하늘에 비는 제천의식에서 비롯 되었다고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전하는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舞天) 등과 같은 고대 부족국가의 제천의식이 있다 삼국시대에 들어와서 불교,도교,유교등이 들어 오면서 많은 영향을 받지만 새로운 종교와 혼합되어 지면서 절엔 산신각과 삼성각을 따로 두면서 까지 이어져 내려왔고 민중들속으로 파고들어 새로운 형태로 발전되어 왔다 이밖에도 신라 진흥왕 때 화랑제도·팔관회의 실시, 고려시대 팔관회·연등회의 실시, 도교·풍수지리·도참사상 등과 새로 도입된 종교 속에서도 토속·무속신앙이 맥을 이어옴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의 팔관회와 같은 굿은 나라굿으로, 규모도 전국적이었으며 이를 통해 공통적인 정서를 형성하였다. 한국무는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나라의 천신제나 시조제와 관련하여 계속 전통적 기능을 담당하였으나 그 기능이 불교·도교에 의해 분화되기 시작했다. 통일신라 중기(8세기경)부터는 개인기복의 무격신앙이 형성되고 고려 말기에 이르러 더욱 발달하여 현재와 비슷한 굿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오늘날과 비슷한 무속의 제의체제가 갖추어진 것을 짐작케 하는 문헌으로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수록되어 있는 장시 〈노무편 老巫篇〉이 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국교화로 불교와 무교가 탄압을 받지만 오히려 고려시대보다 훨씬 더 강하게 민중들에게 무(巫)의식을 갖게 했으며 그로 인해 이 시기에는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유교·불교·도교 등의 종교들이 전래의 무와 융합되었고, 무당의 기능이 더욱 분화되었다.
무속신앙은 사람들의 삶에 중요한 요소로서 역사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굿문화'는 19세기 후반을 지나면서 그리스도교의 도입과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조선문화와 민족정신 말살정책에 의해 다른 민속문화보다도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마을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마을굿에 대한 탄압은 매우 심했다. 한편 일본 제국주의는 산미증식계획에 따른 농업장려운동의 한 부분으로 두레굿만을 허용했고, 굿패들이 굿을 하는 데 있어 농악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야만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일제의 이러한 탄압은 굿을 농업에 국한된 음악으로 전락시켰다. 이렇듯 그 형성·발전에 관한 역사적인 장애요소들로 인해 해방 이후에도 전통무의 관습이 제대로 전해내려오지 못하고 있다....<일부 백과사전 인용>
제단에 쓰여진 수많은 신들의 이름
굿은 거리라고 불리는 형태로 진행이 된다 신을 맞는 준비를 하는 과정과 신을 대접하는 과정에서 춤과 공수(말)로 구분이 되어진다 그리고 신을 술과 춤으로 접대를 하고 보내는 과정이다 한 거리마다 다 각기 틀리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위의 장면은 서낭신 굿풀이 장면이다<>
서낭신에 대한 굿풀이가 끝나자 오방색천 풀기로 들어간다
원래 묶여 있던 천을 돌리면서 풀고 난뒤 다시 일정한 길이로 천을 접는데 끝부분이 맞아야 끝이 난다 만약 끝이 맞질 않으면 다시 천을 풀고 끝이 맞을 때까지 다시 접기를 한다
무당이 들고 있는 깃발이다
내림굿을 하여 무당이 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신당을 꾸미고 집 앞에다 깃발을 꽂는 일이다. 무당들은 이것을 천황기 또는 서낭기라 부르며 긴 대나무에다 붉은 천과 흰 천을 매달아 꽂는다. 이 깃발은, 고대에 어떠한 지역을 성역화 하기 위하여 *소도(蘇塗)라는 것을 설치하였는데 소도의 가운데 '모'라는 깃발을 세운데서 유래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던 '모'가 변형되어 지금은 무당 집 앞에 꽂혀 있으니, 무당 집은 하늘과 땅에 제사지내는 즉 굿을 하는 신성한 곳이라는 뜻이다. 이렇듯 소도에 세운 모가 오랜 세월이 지나 지금의 무당집 앞에 대나무에 걸린 천조각으로 변형이 되었지만 이 깃발을 다는 순간 무당 집은 일반 사람으로서의 집이 아니라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백성들을 교화하고 오상의 계를(충.효.신.용.인 ) 닦도록 하는 아주 중요하고도 신성한 소도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또한 점집에 만(卍)자를 쓴 것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불교와 무교가 합쳐진 예이다. 우주와 인간의 삶과 죽음, 윤회를 주관하는 신의 영력을 나타내는 만(卍)자기를 꽂아놓음으로써 그 곳이 신의 대리자인 무당(점장이)이 있는 곳임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무당을 만신이라고 부르는데서도 신의 영력을 지닌 자임을 알리는 것이다.
무당이 들고 있는 깃발을 뽑을때 적색기는 모든 재수를 주고, 백색기는 병을 낫게 해주고 수명을 늘려주며, 황색기는 조상이 편안치 못하여 액이 많고, 청색기는 재물을 불려 주며, 흑색이나 녹색의 기는 질병과 우환이 많이 생긴다는 뜻을 나타낸다.
이 장면은 큰거리이다 큰거리는 팔도의 산신과 장군신을 모시는 굿이다 청룡언월도와 삼지창을 들고 한참을 춤추다가 신이 내리면 제가집(굿를 신청한 사람)에게 공수를 내리고 안주로 놓여진 돼지나 소머리를 삼지창에 꽂아 사실 세운다
무당이 삼지창을 돼지에 꽂자 장정 두사람이 겨우 돼지를 들어 세운다
저 무거운 돼지를 세워 양손을 떼면 몇 초간 서 있어야 좋다고 한다 이걸 사실 세운다고 한다 사실이 빨리 서야 좋고 늦게 서거나 세우는 도중 쓰러지면 흉하다고 한다 이 사실은 놓여진 모든 음식 전부 행하여 진다 떡시루도 올리고 북어도 올리고 사실을 세운다 모든 귀신들이 굿을 만족 했나 보다 모든 사실을 잘 세웠다
위 사진은 모든 신들을 배에 태워 떠나 보내는 의식이다
모든 조상신과 산신들에 대한 굿이 끝나면 이제 조상당에 들지 못하는 수많은 거리 귀신들에게 행해지는 거리이다 무주고혼제라고도 한다 서낭, 걸립, 말명, 맹인, 터주, 상문, 영산, 수비, 허주, 잡귀등의 하신들이 놀려 지며 굿을 하고 난뒤에 늘어지고 쳐지지말고 잘들 먹고, 놀고 돌아가라고 축원하고 뒷전상에 차렷던 음식들을 풀어 먹인다.
한참을 사물에 맞춰 춤을 추다가 갑자기 칼을 들고 거리귀신들을 위해 따로 마련된 제단으로 달려가 춤을 추기 시작한다
한참을 칼로 춤을 추더니 혓바닥을 내고 날이 시퍼런 칼로 혀를 긋는다
이 칼은 타살칼이라 한다 억울하게 죽은 귀신들을 위로하는 것으로 돼지를 잡았던 칼로 춤을 추어 위로를 하여 피를 흘리고 다치게 하는 살을 막아 달라는 의미이다
또 다른 칼로 다시 혀를 긋는데 피가 나질 않는다 거리귀신들이 만족스러운 대접을 받았나 보다
이번엔 칼로 자신의 손목을 긋고 있다
옆구리도 찔러 보고 얼굴에도 그어보고
그리고선 칼 두자루를 차례로 내 던진다
칼자루를 여러차례 던진후 휑한 눈으로 둘러 보더니 거리귀신들을 위한 상에 놓여진 제물들을 마구 던진다
조상신에 놓여진 술병을 들더니 한모금 가득 머금고는 뱉어 내어 버리고 상에 놓여진 생고기 한점과 미나리 한단을 입에 물더니 우스광 스런 몸짓으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뒤엔 계속 보살님이 따라 다닌다 무당이 제단에 놓여진 음식을 먹어서는 안되니까 그걸 막기 위해서 따라 다닌다고 다른 보살이 나에게 말해 준다
이건 인간이 하는 짓이 아니라 귀신이 하는 짓이다 무녀를 통해 접신한 귀신이 하는 짓이다 놓여진 오이와 당근을 집더니 춤을 추다가 제가집 다리를 잡고 비벼 대더니 뚝 분질러 내동댕이를 친다
이번엔 동동주를. 또 다른 먹거리를 찾고 있나 보다
머리에 동동주를 올리고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입에 넣기도 하고 머리에 이기도 하며
박스채로 가져가기도 한다 이건 귀신들이 하는 짓이다
귀신들을 보내려 하자 땅바닥에 한참을 딩굴더니 다시 먹거리를 주자 무녀의 몸이 정상으로 돌아 온다
이제 거리귀신들을 위해 가지고 춤주었던 천을 푸는 거리를 한다 제가집부터 사물을 하는 이들 그리고 구경꾼에게도 나에게도 모든 액을 잘 풀리게 해 달라는 뜻이란다 사물을 하는 이의 노래를 들어니 "동정들고 나는 간다. 끈을 풀고 나는 간다...."라고 노래를 부른다
조상신 제단에 마지막 칼춤을 추고 신들을 보내는 의식이다
무속에서는 사람이 죽어 망자가 되면 형기(刑器)인 칼을 쓴다고 믿 는다. 칼은 칼로 푼다는 무속적 심성이 신칼에 투영되어 망자의 고 통을 덜어주는 주술적인 힘이 이 칼에 있다고 믿어진다
이제는 모든 굿을 끝내는 마지막 뱃놀이거리다 제단에 놓여진 신들을 위한 옷가지와 신들의 이름이 쓰여진 모든 것들을 싸서 한곳으로 모아두고 고를 풀어서 신들을 배에 태워 보내는 의식이다
뱃길을 만든 천을 찢어 무녀의 몸에 감고 무녀는 배를 잡고 바다로 모든 귀신들을 떠나 보내는 굿의 마지막 의식이다
아침부터 시작한 굿이 이제서야 마쳤다 시계를 보니 벌써 6시가 훨 넘었다 처음부터 다 올리지 못해 아쉽지만 나에겐 또 다른 느낌이였다 아직은 굿에 대한 자세한 용어들을 잘 몰라 박수무당으로 나오신 정광옥님과 무녀인 남수남에게 물어서 적어 놓았던 걸 글로써 써 보았고 혹 모르는 부분은 인터넷으로 찾아 올린 것이다 또다른 접신의 세계에 빠져 보는 것도 멋진 추억 일 것이다